둔황 알림

제목“먼 서역 길 나서면 아는 이도 드무니.” 는 무슨 뜻인가요? 둔황에 도착하면 알 수 있습니다~ 2020-01-08 17:41:24
작성자 Level 10


 

양관에 대해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유명한 한 당시를 틀림없이 떠올릴 것이다.

그대여, 비우고 가시구려, 먼 서역 길 나서면 아는 이도 드무니.”

친구에 대한 왕웨이 시인의 애틋한 정은 이국 땅을 밟은 뒤 친지와 친구가 없는 적적한 삶에 대한 그의 우려를 극명하게 그려냈다. 

천백 년 동안, 이 시는 벗을 아끼고 이별할 때 반드시 읊는 절창이 되었고, 모든 중국인들에게 변경의 이름인 양관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양관은 도대체 어디에 있길래,

시인은 왜 이 친구와의 이별에 대해 이렇게도 감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일까?

양관 하면 2000여 년 전 한무제가 허시를 정복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기원전 121년 늠름한 청년이 하서지방에서 흉노를 물리치고 허시회 복도를 점령했다.


 


한무제는 하서에 무위, 주천 양군을 설치하고, 동시에 서역지역을 더 잘 경영하기 위하여,

 서역제국과 서로 왕래하며, 하서 회랑의 최서단, 즉 오늘날 둔황의 서남쪽 두 곳을 설치하였다.

이 두 곳이 바로 양관” 옥문관"이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무제는 중원에서 인민을 징발하여 변방으로 이동하게 하고,

장성을 축조하여 두 관문을 연결한 '한장성'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10 뒤인 기원전 111 서역과 중원문화, 상업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양관을 관리하기 위해 기존 주천과 무위군에 둔황과 장예를 추가했다.

둔황군, 관둔황, 용륵, 효곡, 광지, 연천, 명안 6, 그리고 양관과 옥문관은 용륵현 경내에 있다.

 

 


한나라의 이민 이동 정책으로 당시 둔황 지역의 주민은 모두 한인이었다.

옥문관과 양관을 벗어나면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며 신앙이 다르며 관습이 다른 서역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 생활 때문에 중원에서 건너온 한인들이 한동안 적응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역은 갈 길이 멀고, 이 이별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때는 비행기도, 기차도, 전화도, 위챗도 없었기 때문에 한 번의 이별도 영원한 이별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서역으로 떠나기 전의 양관에서의 이별은 더욱 슬프고 비장했다.



 


오늘날의 양관, 옥문관 아래에 서면

사람들은 여전히 ' 서역 나서면 아는 이도 드무니 ', '봄바람은 옥문관을 넘지 못하는데' 라는 시구를 떠올리지만,

영원한 이별이라는 옛사람들의 애틋한 이별의 순간들을 더욱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