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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장성 문화를 되돌아보다2020-02-29 23:47:41
작성자 Level 10



서한 무제 때 흉노에게 반격 전쟁을 일으켜 흉노를 북쪽 사막으로 내몰았다.


​북서쪽 변방의 정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20여년에 걸쳐 동서로 랴오둥, 뤄부박으로 이어지는 만리장성이 속속 건설되었다.


​이 중 하서한 장성은 동쪽에서 황하 서쪽 기슭에 이르고 서쪽에서 둔황 서경 느릅나무 샘 분지에 이르러 하서 회랑 북경 전역을 가로질러 2000 km를 뻗어 있다.


만리장성이 방어 체계로 사용된 것은 이미 25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한시에 축조된 만리장성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길이가 긴 만리장성이다.


​한 왕조가 무제 때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첫째, 흉노족들이 한 왕조 침략에 효과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둘째, 북부 흉노족과 남부 강인의 군사 연합을 막고, 흉노의 오른팔을 잘라 버리기 위한 것이다.


​셋째, 서역을 뚫어서 왕래를 하는 것이다. 한무제는 원초원년에서 3(기원전 104 - 102)


노루 도위 루버드가 고란에서 황하를 따라 서건물 변벽으로 갔다. 둔황에서 랴오둥까지는 길이가 만 천오백여 리이다.


​둔황 경내의 한장성, 동기과주, 둔황과 접경하는 북호, 서지서호마의 미로는 모두 136km 길이다.


​경내의 장성 연선에는 한대 봉수 80여 기, 경내 다른 곳과 연대에 따라 축조된 봉수대 등 모두 1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기원전 127년부터 한장성은 여섯 차례에 걸쳐 축조되었다. 한장성은 벽체, 적대, 봉수대, 그리고 그와 연계된 성채, 정자, 벽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체는 만리장성의 주요 건물로, 만리장성의 연선 수 천명의 관문과 성벽, 봉수를 하나로 연결하였다.


​장성과 관련 봉화대성장 등 군사방어시설 건축방식은 각각 '인지제적취재'사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성벽은 황토로 쌓은 것이 많은데, 벽체는 천연 버들가지와 갈대 줄기가 근골격계로 되어 있고, 붉은 버들 한 겹과 모래알이 겹겹이 쌓여 있다.



​봉수대는 흙벽돌, 홍류, 모래, 돌 등을 재료로 쌓고 협축하여 만들었다.


​만리장성의 역할에는 주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


​첫번째는 침략을 방어하고, 나라의 영토를 안전하게 보존하며,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다 ;


​두번째는 둔전을 개발하고 둔전과 변방 지역의 생산 발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


​세번째는 통신의 원활함과 상여사자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한대에는 23~56세 남자라면 누구나 1년간 국경 수비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평상시에 밭을 개간하고 전시에 전쟁을 한다.


​한장성의 수비군은, 봉화를 바라보는 이졸을 상시적으로 훈련하고, 정시에 심사하는 엄격한 군사 행정 관리 제도를 가지고 있다.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상을 받을 수 있다.


​내지에서 유배되어 이곳으로 온 각급 관리들과 사졸들도 있는데,


​이들은 이곳에 와서는 종종 가족을 데리고 다니며 변두리의 각종 힘쓰는 노동에 오랫동안 종사해왔다.



 

봉화제도는 서주에 이미 나타났다. 한대 변색봉수제도는 한봉수제도의 하나이다.


​한대 변색의 중요한 군사경비와 통신의 제도와 시설이다.


​중앙, , 부도위 3급에서 한 단계씩 수여한다.


​한대의 봉화 신호는 약봉, , 담배, , 적봉 다섯 종류가 있으며, 앞의 세 종류의 백주에 사용되었으며,


​불은 주로 야간 경보, 적급 주간, 야간 겸용으로 사용되었다.


​봉화제도의 엄격한 시행을 위해 한대 변색방어체계에 촘촘한 장치가 만들어졌다.


​적봉은 밀린 각종 땔감으로 밤낮으로 쓸 수 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흉노인 및 말소리, 강한 바람, , 봉화를 듣지 않는 자는


반드시 경고 신호와 조치 규정을 두고 잘못시방하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